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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발명품 업적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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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_ 2020. 6. 25.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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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정약용 발명품 업적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려고 합니다.







정약용(1762년 ~ 1836년)은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미용(美庸), 귀농(歸農),

호는 다산(茶山), 태수(苔叟),

철마살인(鐵馬山人) 등,

시호는 문도(文度)


어렸을 때부터 차분하고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을 가졌으며 

1783년에 진사시에 합격을 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28세가 되는 해에

대과에 합격을 해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조선 후기 18세기의 문신으로

유학자, 실학자로 이익의 학통을 이어

발전을 시키고 사회 개혁 사상들을 제안을

하여서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려고 

경제, 정치, 문화, 사회 등의 전반적인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으며 조선 왕조 질서를

강화시켜 왕도정치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노력을 하였으며







정조의 최측근으로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

사험부지평, 홍문관수찬, 경기암행어사, 사간원사간,

동부승지좌부승지, 곡산부사, 병조 참지,

부호 군, 형조 참의 등의 역임을 했으며


경제 위 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목민심서 등의

500여권을 저술을 하였습니다.





정조가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수원화성을 축조를 하였는데


이때 정약용이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때 사용할 수 있는 녹로와

자재를 나를 수 있는 수레 유형거,

물레와 도르래의 원리를 응용하여

무거운 것을 쉽게 들어서 옮길 수 있는

거중기 등의 건설 기계를 만들었고

부역을 하는 백성들에 대한 

정조의 아낌없는 배려로 


완공이 10년 이상으로 예정되었던 것을

 2년 9개월의 기간에 완성을 하였습니다.


화성의 건축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을 한

<화성성역의궤>에 거중기의 전체적인 모습과

분해를 한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또한 정조가 아버지의 능과 화성에 가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서 수원으로 가야 했는데


왕이 행차를 할 때 뒤를 따르는 일행의 수가

많아서 모두를 태우고 배로 건너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정약용이 배를 가로로 연달아 잇댄 다음

그 위에 판자를 깔고 나서 흙으로 덮은

배다리를 만들어 모든 일행이 안전하게

시간을 단축하여 한강을 건널 수 있었어요.







하지만 23세에 이벽과 이승훈 등에게

서학에 대해서 듣고  관심을 가졌지만

이는 천주교에 대한 활동을 했다고 

의심을 사 정치적인 활동에 지장을 주었어요.


1791년에 신앙 여부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었고 무관하다고 변호를

계속하였지만 1901년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하며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으로 유배생활이

이어졌지만 이 시기에 학문 연구에 매진하여 

실학적 학문을 완성을 시키는 기회로 삼았으며


그 후에 향리에서 은거를 하며 상서 등을

연구하고 매씨서평의 아언각비나 개정, 증보 작업,

사대고례산보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상 정약용 발명품 업적에 대해서 알아보자에

대한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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